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셀 르페브르 (문단 편집) === 신학생 시절 === 마르셀도 독실한 가정의 영향으로 독실한 [[가톨릭]]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중등학교인 성심학교에 다니던 청소년기에 이미 성소의 마음을 품고 있던 그는, 먼저 사제의 길을 걷고 있던 형 르네 르페브르의 권고로 사제의 길을 걷기로 한 마음을 굳힌다. 마르셀은 [[교구]] 신학교에 입학하지 않고 성신신부회(Holy Ghost Fathers)에서 설립한 [[로마]]의 프랑스 신학교에 입학한다. 교구 신학교에 입학하는 대신 로마의 프랑스 신학교에 입학한 이유는, 아버지와 형의 영향 및 자신의 소망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교구 신학교가 [[자유주의]]에 물들고 있다고 생각해 입학에 반대했고, 형인 르네도 이미 로마의 프랑스 신학교에 재학중이었다. 여기에 선교사제로 일하고 싶다는 마르셀 본인의 소망이 더해져 로마의 프랑스 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성신신부회(Holy Ghost Fathers)는 1700년 클로드프랑수아 풀라르 데 플라스(Claude-Francois Poullart des Places)에 의해 설립된 사제단이다. 설립 초기부터 신학교를 운영하여 18세기에 이미 뛰어난 선교사제를 여럿 배출해내었다. 하지만 19세기에 이르러 침체에 빠졌다. 침체에 빠진 단체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은 것은 [[유대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가경자]] 프랑수아 리베르만[* 1804-1852, François Libermann, 본명 Jacob Libermann] 신부였다. 리베르만 신부는 [[아프리카]]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마리아의 성심 수도회를 설립했는데, 이 수도회가 1848년 기존의 성신신부회와 통합하여 성신신부회는 다시 활력을 찾았다. 그리고 재설립되다시피 한 성신신부회는 1853년 교황 [[비오 9세]]의 호소로 로마에 프랑스 신학교를 설립한다. 로마의 프랑스 신학교 역시 이전의 성신신부회 신학교처럼 뛰어난 선교사제를 여럿 배출해내었다. 신학교에서 마르셀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작을 특히 좋아했다. [[가톨릭]] 신학교 과정 자체가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향을 받았고 모든 신학생들이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공부해야 했지만, 신학생 마르셀은 "천사와도 같은 박사"의 저작을 특히 좋아하여 즐겨 읽었다. 마르셀 르페브르는 이 로마의 프랑스 신학교의 당시 학장인 앙리 르 플로슈 사제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전통적 신앙관을 가지게 되었다. 앙리 르 플로슈 사제는 [[프랑스 혁명]]으로부터 기원한 [[혁명]] 사상과 [[자유주의]] 사상에 확고하게 반대한 사람으로서 신학생들에게도 혁명 사상과 자유주의 사상에 대해 경각심을 갖도록 했다. 하지만 그는 1927년 마르셀의 군 복무 도중 악시옹 프랑세즈(Action française) 사건에 휘말려 신학교 학장직을 사임했다. 그런 가운데 마르셀 르페브르는 학업을 계속하여 1929년 4월에 [[부제(성직자)|부제]] 서품을 받고, 9월에 드디어 사제 서품을 받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